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콤 엑스 (문단 편집) ===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의 활동 === [[파일:external/farm2.static.flickr.com/808738287_8ff86b5544.jpg]]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몸담으면서 뛰어난 수완과 연설 실력을 발휘해서 1952년 500여 명에 불과했던 작은 종교조직을 1963년 무렵 25,000명에 달하는 거대조직으로 성장시켰다. 당시의 유명한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의 운동노선과는 반대로, 그의 노선은 이른바 '흑인국민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로 압축될 수 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면 또 다른 차별만이 있을 것이니, 흑인들이 실력을 길러서 백인들 사회에서 분리된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도 하던 주장이었고, 실제로 [[라이베리아]] 건국 과정에서도 이런 논리가 뒤따랐다. 물론 "분리"된 흑인들이 본토 아프리카에서 '노예 출신 자유흑인 > 본토출신 흑인'이란 깽판을 벌였다는 것은 흑역사.] <플레이 보이>와의 인터뷰에선, 미국의 영토 일부를 할양받아 흑인들만의 자치구역으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또한 선동적이고 과격한 연설로 당시 흑인 하류층의 분노를 고발하고 백인 주류 사회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서 백인과의 공존과 타협을 지향한 킹 목사의 인권운동노선 역시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과격한 노선 때문에 일반 대중이 당시에 사실 급진적이었던 킹 목사의 노선을 온건하게 받아들이게 된 면이 있다.] 오히려 흑백통합노선의 인권운동을 "백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그렇다고 킹을 싫어한 건 아니고 나름대로 존중했다. 특히 1957년의 힌튼 존슨 사건은 그를 크게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존슨이라는 흑인 [[이슬람]]교도가 [[뉴욕 경찰국|뉴욕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이 사실을 안 흑인 8백여 명이 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경찰 측에서 엑스와 접촉을 했다. 말콤은 교섭 끝에 존슨을 치료할 것과 폭행한 경찰을 처벌할 것을 약속받고 이를 경찰서 앞에 모여 있던 흑인들에게 전달하고 흑인들을 순식간에 해산시켰다. 이 장면은 그 유명한 영화 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러나 당시 흑인인권운동 노선의 대세가 백인과 흑인의 통합이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이 되었으며, 그가 인기를 끈 이유도 흑백분리 주장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백인 주류의 미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때문인 면이 더 강했다. 말하자면 '''"저 사람 말빨 쫌 쩌는 듯"''', '''"내 속이 다 시원하네"'''란 의미가 더 강했다는 것.[* 당시 미국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지도자가 누구냐는 설문에 대다수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택했고, 말콤 엑스는 8%에 그쳤다. 그러나 훗날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느낀 흑인들은 전투적인 지도자들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쪽으로 여론은 반전되며, 이때부터 말콤 엑스가 주목받기 시작한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당시 그가 직접적으로 흑인민권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대외적으로 교리상 신도에게 종교활동 이외의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표방했다. 그의 활동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대변인으로서 했던 선교활동에 그쳤다고 하며, 흑인민권운동과 관련된 행진, 시위나 서명 등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한다. 그러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교리의 목적은 애초 백인에 대한 악마화, 흑백분리국가의 수립 및 흑인사회의 도덕 재무장과 계몽에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